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4000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계14:1

언약과 성소

제목언약과 성소 001 언약2023-05-16 17:40
작성자 Level 10

01 성소 언약

 

오늘부터 성소를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는 성소하면 성소 자체만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성소를 주신 이유가 언약을 체결했기 때문이에요 그 언약을 이루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참 하나님 형상으로 변화시켜주시고 그래야 하나님과 언약을 이룰 것 아니겠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켜주지 않고 가라지로 살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과 언약을 이루겠습니까 그래서 성소는 언약을 이루어주기 위하여 주신 것이에요.

그러니까 성소는 누구한테 줘요? 언약을 체결한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언약을 체결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와 아무 상관없습니다.

언약은 누구와 체결했냐? 출애굽한 사람과 체결을 했어요. 출애굽 하지 않은 사람과는 하나님은 그 언약을 맺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에 살고 있다. 세상에 속하였다. 그런 사람과 어떻게 언약을 체결할 수 있겠습니까. 너희는 내 아들과 딸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다고 하는 게 이 언약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속하여 세상을 따라 사는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 아들과 딸로 삼을 것이며 그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냐고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언약은 반드시 출애굽한 사람들과만 체결할 수 있어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불러내서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고 예수님께 속하여 있는 사람들과 언약을 체결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성소를 올바로 이해하고 성소봉사를 받으려고 하면 언약부터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19장부터 24장까지가 언약을 체결하는 그런 내용이에요.

그냥 언약 체결하는 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문제가 많아요.

그 사람들과 언약을 체결하려고 하는데 우리 사람은 본성적으로 이기적이에요.

하나님께서 좋은 걸 준다고 하면 무조건 하나님을 믿는다고 그래요. 하나님께서 하늘과 영생을 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믿습니다. 뭐 그냥 체결합시다 해놓고는 그 언약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육신을 따라 살아버려요. 그게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약을 체결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참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게 그래서 어려워요. 거듭나 있지를 않단 말입니다. 거듭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에요. 여전히 가라지죠.

 

이 거듭남에 대하여 사람들이 완전히 오해를 하고 있어요. 교회에서 늘 그렇게 가르침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것은 성경 말씀이죠. 그런데 자기들은 주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구원을 받았다고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받았다고 하면 거듭났어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자기들은 거듭났다고 그렇게 믿어요.

 

그런데 그들의 생애를 보면 거듭난 것이 전혀 아니에요. 여전히 가라지, 여전히 죄를 섬기면서 죄를 따라서 죄의 노예로 살고 있어요. 거듭나는 건 그게 아닙니다.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이에요 육이 영이 되는 것이에요. 가라지가 알곡이 되는 겁니다. 가시나무가 포도나무가 되는 게 그게 거듭나는 것이에요. 이리가 양이 되는 것이에요.

 

예수님께서 양이 되고 싶은 이리에 관해서 말씀을 하셨죠. 이리가 양의 옷을 입고 양의 우리에 들어와서 살아요. 양이 되고 싶어서 구원받고 싶으니까. 그런데 겉으로 보면 양처럼 보여요. 왜냐하면 양이 옷을 입고 있으니까. 그런데 속은 이리에요. 사람들은 그게 거듭났다고 그렇게 생각들을 하려고 그래요. 속은 이리고 겉모양만 양인데 그게 거듭난 거냐고요?

그러면 이 이리는 양이 되고 싶으니까 양 무리에 들어와서 다른 양들처럼 살려고 많은 노력을 합니다. 이리는 풀을 안 먹어요. 그런데 양들이 풀을 먹으니까 자기도 풀을 먹으려고 노력을 해요. 그런데 풀이 아무리 먹어도 맛이 없고 목에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꾸 목에 걸려요. 그러면서 예수 믿고 사는 것이 너무 어렵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속이 이리인데 어떻게 풀만 먹고 살아질 수가 있냐고요? 온몸이 그냥 고기를 얼마나 갈망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안 보는 데서 양을 잡아먹어요. 그게 양의 옷을 입고 온 이리가 하는 일이에요. 그게 거듭난 겁니까? 거듭난 게 아니에요.

 

그렇게 해봤자 아무 소용 없어요. 거듭나는 건 뭐냐. 이리가 양의 옷을 입는 것이 아니고 이리가 양이 되는 것입니다. 양이 되어버리면 양처럼 사는 것은 당연해요. 양인데 양처럼 살지, 양이 어떻게 이리처럼 살겠습니까. 그게 거듭난 거예요. 그런 사람이라야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가시나무가 포도나무처럼 살려고 아무리 해봐야 포도가 안 맺혀요. 가시나무는 여전히 가시만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포도를 맺히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포도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처럼 살려고 하면 먼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그게 거듭남이고 그런 사람이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고 언약 안에서 사는 사람이에요.

 

바로 그 일을 해주는 게 성소봉사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까 너무 좋아요 우리는 평생 살아봤자 얼마 못 사는데 영생을 주겠다고 그래요. 하늘나라를 주겠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이기적인 사람이 그 약속을 받고 싶죠.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요.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을 한다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아무리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는 대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을 한다고 가시나무가 포도나무가 되냐고요. 가시나무는 여전히 가시나무죠. 가시나무를 포도나무로 만드시는 것은 그게 거듭남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는데 그건 가시나무가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할지라도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가시나무가 포도나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불가능해요. 절대로 불가능해요. 우리 사람들은 그 불가능한 것을 자꾸 하려고 그래요. 그게 믿음인 줄 알아요. 그게 하나님의 언약 안에 사는 것인 줄로 착각을 하고 있어요. 그게 아닙니다.

 

가시나무를 포도나무로 만드는 역사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해야 하는 일이에요.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 예수님께서 바로 이 가시나무를 포도나무로 만들어주기 위하여 예수님 자신이 가시나무로, 죄를 전혀 알지도 못하신 분이 죄 자체가 되어서 십자가의 죽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없이 우리로 하여금 가시나무를 포도나무가 되게 만들어줄 수 없어요.

 

왜냐하면 가시나무가 포도나무가 되려고 하면 가시나무 자체가 죽어야 되요.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니까 가시나무를 포도나무로 무조건 만들어버린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죽지도 않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가시나무인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어야 돼요. 왜냐하면 죽지 않고서는 가시나무 본성에서 절대로 해방이 안 됩니다. 우리의 본성이 바로 가시나무 본성이에요. 그리고 우리가 평생 살아왔던 그 삶이 죄의 성질을, 본성을 따라 살아온 거잖아요. 우리의 마음판에 육신에 가시나무 성질, 죄의 성질만 잔뜩 새겨져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 믿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까. 예수님이 나를 대신 죽었으니까. 나는 죽지 않고 영생을 갖는다. 그렇게 믿는다고 내 속에 있는 본성에서 내가 해방이 되냐구요. 죄의 성질에서 해방이 안 됩니다. 내 죄 성질은 여전히 내 속에서 나를 사로 잡아가버려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다 그런 착각 속에 신앙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신앙을 아무리 오래 해봤자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그런 신앙을 가지고서는 하나님께서 이 가시나무를 포도나무로 완전히 만들어줄 수가 없어요. 가시나무는 가시나무 성질에 대해 먼저 죽어야 되요. 예수님께서 거듭난다 하신 말씀은 육인 나는 죽고 영이 된다는 그런 말이에요. 예수님을 믿으면 저절로 영이 된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복음을 철저하게 깨달았습니다. 자기 육신의 욕망, 자기 자신과 얼마나 싸웠는지 몰라요. 왜냐하면 자기 육신의 본성을 따라서 살고 싶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살기를 너무나 원했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자신이 기도를 그렇게 많이 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하나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여 완전히 의를 따라 거룩하게 살려고 하면 할수록 자기 속에서 뭐가 일을 해버려요? 본성이 일을 해버려요. 본성이, 육신의 정욕이 일을 해버려요. 그래서 "내 지체 속에 있는 죄가 나를 사로잡아서 죄 아래로 끌어오는 것을 보는 도다." 그래요. 그걸 하루 이틀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하여 완전히 절망할 때까지 그렇게 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로마서 714절부터 24절까지입니다.

 

그렇게 싸워봐야 알아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만을 따라서 의만을 따라서 완전히 살려고 젖 먹던 힘까지 다 동원해서 기도를 많이 하고 살려고 온 힘을 다해서 해보고 해보고 또 해보고. 그렇게 하루 이틀을 한 게 아니에요. 그렇게 얼마나 오랫동안 자기 자신과 싸웠는지 자기 본성과 싸웠는지 그건 자세하게 기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절망할 때까지 했다 그 말이에요.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한은 계속 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아무리 의를 따라 살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의 율법과 계명에 완전하게 순종하여 의를 이루려고 하면 할수록 자기 본성 속에는, 자기 지체 속에 있는 죄가 자기를 사로잡아서 죄 아래로 끌어와서 결국에는 죄를 범하게 만들어버렸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절망을 해요. 내 속에서 선한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자기는 하나님의 의를, 그 율법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자기 속에 전혀 없다. 자기 속에 있는 것은 전부 다 죄 덩어리 뿐이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죄밖에 없구나. 그것을 처절하게 깨달았어요. 그러고는 자기 자신을 죄로부터 해방시켜주고 구원해 주셔서 온전히 의의 열매만을 맺으면서 살도록 해주는 다시 말하면 가시나무를 포도나무로 완전하게 만들어주시는 분이 자기의 구주인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고 그런 예수님을 온 마음을 다해서 믿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 바쳐버렸습니다.

 

그 예수님이 사도 바울에게는 너무 너무나 귀중했어요. 자기 속에서 생기는 모든 욕망. 자기에게 지금까지 아주 유익하고 자기에게 좋은 것들을 주었던 그 모든 것들이 이제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이에요. 그래서 그것들이 자기에게 해가 된다. 자기의 원수다. 그렇게 생각하고 배설물처럼 버려버렸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얻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예수님이 그렇게 귀중했어요. 왜냐하면 자기 자신과 자기 본성과 싸워본 사람이라야 우리를 가시나무 성질에서 완전히 해방시키고 포도나무로 만들어주시는 예수님이 얼마나 중요하고 귀한 분인지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러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절망을 하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깨달은 다음부터는 단 한순간도 자기의 욕망의 본성에 끌려간 적 없어요.

 

날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는다고 말을 해요. 왜냐하면 죄인인 자기 자신, 가시나무인 자기 자신이 십자가 예수님과 함께 죽어있어야 한다고 하는 걸 처절하게 깨달은 겁니다. 그냥 머릿속으로 깨달은 게 아니에요. 자기의 본성과 싸우면서 깨달은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이러한 복음의 비밀을 깨달은 다음에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의 속에 있는 선을 따르고 싶은 그런 욕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게 처절하게 항상 실패했거든요. 자기의 젖 먹던 힘까지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해봤어요. 완전히 깨달았어요. 자기 속에 선한 게 전혀 없다. 죄밖에 없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해봤자 저희에게 끌려가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하는 걸 깨닫고 깨닫고 너무나도 자기 자신에서 완전히 절망하기까지 깨달았어요. 그 다음부터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항상 쳐서 예수님께 복종시켰어요. 그랬더니 어떤 역사가 일어나요? 항상 이겨요. 진적이 없어요.

 

그렇게 해 주시는 예수님의 복음 역사가 바로 성소봉사라고 하는 겁니다. 그 일을 위해서 언약을 체결한 사람들에게 성소봉사를 주신 것이에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복음의 역사, 성소봉사를 하지 않고는 언약을 이룰 길이 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성소를 올바로 깨달으려면 언약부터 올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렇게 가시나무고 본성이 죄 자체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마음판에 새겨진 것은 죄 성질 외에는 없는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언약을 이러한 우리와 체결해 주십니다. 언약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죽으시고 십자가의 권능을 가지고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복음의 역사를 하시사 가시나무 성질이 가진 우리 본성에 대하여 철저하게 예수님과 함께 죽어지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친히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주관하시고 항상 복음의 능력으로 우리 마음을 붙들어주셔서 본성에 전혀 끌려가지 않는 의인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만이 언약을 이룰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주시는 예수님의 은혜의 역사를 눈에 보이도록 보여주신 것이 바로 성소 제도고 봉사입니다. 주님! 성소 제도를 통해서 마음에서 우리를 역사하여 가시나무를 포도나무로 항상 만드시고 포도 열매를 충만하게 맺히게 하시는 그런 예수님의 복음의 역사를 참으로 사도 바울처럼 깨닫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사도 바울처럼 항상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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