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출19장 언약2 이 시간에는 출애굽기 19장 언약 그 두 번째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19장 1절입니다. 출 19: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이제 애굽에서 떠나온 그때부터 제3월, 애굽을 떠날 때가 정월 유월절 15일이었습니다. 그때부터 2월달이 지나고 이제 3월달이 되고 그렇게 하면서 상당히 많은 시간이 흘러갔어요. 거의 50일이 지난 그때에 시내산에 도착을 했고 그리고 시내 광야에 장막을 치고 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언약을 체결하십니다. 그냥 이 구절 읽으면 시내 산에 와서 그들과 언약을 체결하셨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넘어가버리기가 너무 쉬워요. 그런데 조금만 더 깊이 생각을 해보면 왜 이때까지 기다리고, 이때야 이스라엘 사람들과 출애굽한 사람들과 언약을 체결 하느냐? 그전에 체결하면 더 좋지 않으냐? 그런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주시는데 하나님과의 약속을 통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에요. 언약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맺은 약속입니다. 그 언약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우리의 육신에서, 본성에서 우리를 완전히 해방시키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을 믿고 우리 자신을 예수님께 드리자마자 이렇게 해 주시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나님께서 약속을 예수님 믿는 사람들에게 주셨어요. 그러면 그 약속을 믿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바치면, 이 약속대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고 완전히 거듭나고 예수님의 형상으로 살도록 해주셔야 됩니다. 이 약속이 바로 그런 뜻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산다고 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이렇게 신앙생애 한 것이 짧은 기간이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어머니 태 속에서부터 신앙생활을 했고 지금 이제 나이가 많이 들어서 흰 머리가 머리를 차지하고 있는 평생 60, 70, 80년을 하나님을 믿고 살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역사가 안 이루어지고 있어요. 신의 성품에 참여하지 못하고 아직도 육신을 따라 살고 있다 말입니다. 이러니까 이런 사람들과 어떻게 언약을 맺을 수 있겠느냐 하는 거예요.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출애굽 하고, 하나님을 믿고 나온 그 사람들과 언약을 체결해서 약속으로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이들과 언약을 체결을 하시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바로 언약을 체결하지를 않아요. 시내 산에 올 때까지 거의 두 달 가까이 지나는 그 노정에 그들과 언약을 체결할 만한 그런 장소가 얼마든지 있었어요. 그런데 왜 이때까지 기다리다가 거의 두 달이 지난 후에야 이들과 언약을 체결하자고 하느냐 하는 것이에요.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의 노예로 산지가 아주 오랜 시간이었습니다. 애굽에 한 200년을 살아요. 야곱이 그의 가족들과 애굽에 내려가고 그렇게 한 지가 많은 시간이 흘러간 겁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요셉이 살아있고 요셉의 은총을 많이 받은 애굽의 권력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요셉의 형제들이니까 그들을 참으로 우대해주고 잘 살도록 그렇게 해 주었는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요셉도 죽고 그리고 요셉과 함께 요셉이 형제들 그들도 다 죽고 이제는 많은 시간이 흘러갔는데 그런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이들을 축복해 주셔서 인구가 굉장히 많이 늘어났어요. 그걸 보고 요셉을 알지 못하는 그런 바로가 큰일 났다고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들은 애굽 사람이 아니에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도 어느 나라에서 살지라도 그 나라 사람들과 동화를 하지 않아요.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대인들은 어디에 살든지 그 나라 민족이 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항상 유대인으로 살아요. 그러니까 바로가 생각할 때 이게 큰 골칫거리예요. 숫자가 얼마 안 된다고 하면 얼마든지 그들을 컨트롤할 수 있겠죠. 그런데 숫자가 엄청 많이 불어났어요. 이들이 스스로 반역을 한다든지 하면 그건 감당할 수 있어요. 애굽의 군대가 그들보다 훨씬 강하니까. 그런데 적국이 쳐들어올 때 그때가 문제가 된다고 생각이 드는 겁니다. ‘외적이 강한 군대를 갖고 쳐들어 왔는데 애굽 안에 살고 있는 이 많은 히브리 사람들이 그들 편에 서서 애굽과 싸워버리면 적국의 군대만이 아니라, 안에서도 문제가 생겨버리면 큰일이 일어날 것이다. 완전히 애굽이 망하게 될 거다.’라는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그러니까 이 히브리 사람들을 이렇게 놔두면 안 되겠어요. 숫자를 줄여야되겠어요.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숫자, 적국이 쳐들어와도 감히 그 적군과 연합해서 애굽에 반역하려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숫자가 아주 적어야 해요. 그러니까 그때부터 학대를 하기 시작을 하는 겁니다. 완전히 노예로 삼아버리는 거예요. 노예로 삼아서 그냥 얼마나 학대를 하고 힘든 일을 시키고 그러면 하루 종일 너무 너무나 힘드니까. 자식들을 생산하는 일에 소홀해질 거 아니에요. 바로는 그걸 기대했는데. 아무리 학대하고 아무리 일을 많이 시켜도 자식들은 그냥 많이 낳아요. 그러니까 안 되겠다 싶어서 아들들. 딸들만 많으면 이게 애굽사람하고 결혼하고 하면 전부다 애굽사람이 되어버릴 거니까. 아들들을 전부 다 나일강에 던지라. 태어나자마자 바로 나일강에 던지라. 그런 명령을 내렸는데 그걸 어떻게 피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성경에 자세히 기록이 안 되어 있으니까 우리들에게 어떻게 그걸 피하고 했는지 기록이 없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들을 보호하시고. 그래서 피할 길을 내셨어요. 자식들을 나일강에 던지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데도 그 히브리 사람들 숫자가 늘어가요. 그러니까 아예 아들을 낳으면 히브리 사람들한테 맡겨놔서 안 되겠어요. 산파를 부릅니다. 애들을 낳으려고 하면 산파가 와서 도와주잖아요. 갓난아기 그냥 숨 넘어가게 하는 것을 산파가 하는 건 너무나 간단해요. 애를 낳은 산모도 모르게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가 있다고 생각이 돼서 산파들을 불러서 사내아이를 낳으면 그 자리에서 죽여라. 정말 끔찍한 그런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 산파들도 히브리 사람이에요. 히브리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감히 그 하나님의 백성을 죽일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안 죽여요. 그러니까 바로가 너희가 왜 내 명령을 어기고 죽이지 않았느냐? 그랬더니 참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산파들의 대답이 참 기가 막혀요. 참 지혜롭게 대답을 합니다. 히브리 여자들은 애굽 여자들과 너무나 다릅니다. 애굽 여자들은 산파가 가서 도와주어야 아이를 낳는데 히브리 여자들은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아이를 다 낳아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죽일 기회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보호를 하시고 피할 길을 내시고 어떻게 해도 이들의 인구수를 줄일 수 없게 돼 가요. 그러는 과정에서 모세가 준비가 됩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그런 바로의 학정 밑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는지 하나님께 부르짖어요. 그때까지는 애굽이 살기 좋았어요. 떠날 생각 전혀 없었어요. 고센 땅은 애굽땅 가운데 가장 좋은 기름진 땅이고 농사짓는 것마다 농사가 너무 잘 되고 자식들은 그냥 더 많이 번성을 하고. 무얼 바라겠어요. 거기서 계속 살면 좋죠. 그런데 바로가 그렇게 학대를 하니까 이제는 생각이 달라지는 겁니다. 애굽에 살아서는 다 망하겠다. 하나님께 자기들을 구원해달라고 부르짖기 시작을 하는 거예요. 그때까지는 하나님께 부르짖을 이유가 없어요. 잘 먹고 잘 살고 편한데 뭐 할라고 부르짖어요. 그렇게 하나님께 열렬하게 부르짖고 참 그게 우리 죄인들의 모습이에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신자들의 문제가 바로 이거예요. 하나님을 아무리 믿어도 평안하기만 해요. 잘 살아요. 돈도 잘 벌어요. 문제가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는 가운데도 그냥 어려움이 좀 생기면 열심히 하나님께 구해서 그 어려움이 좀 이제 해결이 되면 다시 모든 게 잘되고 자식들도 다 잘 살고 그러니까 하나님을 붙들고 씨름할 이유가 없어요. 하나님께 부르짖을 이유가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들의 신앙을 도와줄 기회가 하나님께 주어지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도울 방법이 없어요. 잘만 사는데 간절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할 필요 없잖아요. 이러한 신앙을 하기보다 고난 가운데 있는 것이 천만 배 낫습니다. 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이렇게 바로로 인해서 엄청난 그런 고난과 학대가 생기죠. 도저히 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탄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렇게 출애굽기 2장에서 말씀을 합니다. 그러자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그들이 구원자로 삼으시고 모세를 보내십니다. 이런 역사가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 신자들은 너무나 평온하고 그러면서 영적으로도 잘된다고만 그렇게 믿어요. 라오디게아 교회 신자들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돕냐고요? 복음은 그렇게 잘 살고 모든 것이 평화로운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 지지를 못합니다. 이사야 61장에도 그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주의 성령을 내게 주셔서 나로 하여금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고 그리고 멍에의 줄을 끌러주고...’ 그건 얼른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참 고난 당하고 어려움 당하고, 이런 사람을 다 구원해주는 좋기만한 그런 역사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다음 말씀한 게 아주 중요해요. 가난한 자에게 주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나를 택하시고 성령을 주셨다. 그렇게 말씀해요. 거기에 보면 가난한 사람,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진다 그 말 아닙니다. 심령이 가능한 사람. 그들의 마음이 가난한 사람. 그런 사람이라야 하나님을 찾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잘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다.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께서 이 땅에 오매 주의 백성이 영접지 않았다’ 그래요 왜냐하면 잘 먹고 잘 사니까. 자기들이 의인이라고 생각을 해요. 오늘 아침에도 바리새인들을 가만히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서 흠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었어요. 사도 바울이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 사도 바울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아니란 말이에요.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이 참으로 죄인이라고 하는 걸 그렇게 깊이 깨닫고 율법을 깨닫고 자기가 완전히 사망 가운데 있다, 율법을 깨닫고 보니까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어버렸다. 그걸 깨달은 게 예수님을 만난 후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그런 생각 전혀 없었어요.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만 생각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겉으로 흠 없이 살아요. 바리새인들이 겉으로 흠이 없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대접의 겉을 깨끗이 한다. 그러나 속은 온갖 방탕과 더러운 것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겉이 깨끗한데 속은 안 보이잖아요. 예수님의 눈에만 보이는 거지 자신들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악한 사람들 죄인이라고. 그래서 그들을 멀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를 따라 사는 것이 눈에 확실하게 보여요. 그 사람들이 세리와 죄인들을 괜히 멸시한 게 아니에요. 죄를 따라 살기 때문에 멸시하고 멀리한 겁니다. 그런데 죄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마음이 가난해요. 자기가 죄를 따라서 사니까요. 겉으로 볼 때도 자기는 확실하게 죄의 종이고 죄를 따라서 사는 그런 죄인이잖아요. 그러니까 심령이 가난합니다. 죄에서 구원받기를 원해요. 그래서 예수님의 은혜 역사가 나타나니까, 바리새인들이 죄인이라고 멸시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겁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찾지를 않아요. 오히려 예수님이 잘못한다고 생각을 해요. 하나님을 잘 믿는 자기들을 왜 멀리 하느냐 이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래요. 너는 의인이지 않느냐? 그런 너희들을 내가 어떻게 구원하겠느냐?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필요를 전혀 못 느끼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하기가 가장 어려운 사람들이 세리와 죄인들이 아니에요. 창기가 아니에요. 그렇게 죄 가운데 깊이 빠져서 사는 그 사람들이 아니에요.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너무나 강하게 일어나니까 바리새인들 가운데에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 안에 바리새인들이 여러 명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교회 안에 들어와서도 하나님의 참된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 복음을 대적하는 자칭 사도라고 하는 그런 자들이 돼버려요. 사도 바울의 뒤를 따라 다니면서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에 가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문제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루살렘 교회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유대인 신앙에 젖어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의 신앙을 그대로 가지고 예수님을 믿어요. 유대인들이 볼 때는 참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는 참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종이다 그렇게 생각이 되는 겁니다. 그런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해 세운 사람들을 보니까 완전히 잘못됐어요. 하나님의 율법을, 모세의 율법 성전 이런 거 다 무시해버리고 할례도 받지 말라고 그러고 오직 예수님만 믿으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완전히 하나님의 복음을 망치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그렇게 생각이 돼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마음에 열성이 일어나서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들을 쫓아다니면서 자기들이 믿고 있는 그게 진짜 복음이라고 구약성경으로 강력하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에게로 들어오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지키라고 한 모든 율법, 그게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율법이에요. 그들이 말하는 율법이 다 유대인들의 유전과 전통입니다. 유대인의 유전과 전통을 따라서 신앙을 해야 한다고 그 뒤를 쫓아다니면서 그렇게 가르쳐요. 예수님만 믿어서는 구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교회들을 굉장히 뒤흔들어서 어려움을 많이 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단의 일꾼이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해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 안에 들어와서 조차도 그 교회를 망치는 그런 일을 했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는 길이에요. 그런 사람한테는 복음을 전할 수가 없어요.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자기들이 생각할 때 부자예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어요. 물질적으로 그런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그런다고 생각을 하고 자기들이 다 구원받았다. 그리고 의인이라고 그래요. 거듭났다 그래요. 그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겠냐고요? 복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해져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에게 보냈다. 그렇게 말씀을 해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에요. 자기들이 잘못되었다고 그렇게 느끼고. 잘못된 죄에서 구원해 줄 그런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참 이렇게 마음이 부유한 그런 상태에서 아무리 오래 신앙을 해봤자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가 없죠. 그러니까 사단을 따라가버리는 거죠. 자기 욕심을 따라가버려요. 평생 동안 그렇게 믿어도 구원이 이루어져 있지를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시내 산에 올 때까지 그 과정에서 이들의 믿음을 세우려고 하신 거예요. 그래서 시내 산에서 이들과 언약을 체결을 했는데 언약을 체결한 후에도 이들은 언약 안에 살지를 않아요. 믿음이 올바로 세워져 있지를 않았다고 하는 겁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살아야만 그래야만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따라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고 완전히 거듭난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 될 것입니다. 주님 어떻게 하든지 이스라엘 사람들의 믿음을 세워서 자기 자신이 참으로 죄인이라는 걸 깨닫고 마음이 참으로 가난해진 그런 상태가 되어서 자기를 죄로부터 구원해 줄 하나님 은혜를 열렬히 찾도록 그들을 이끌어갔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그런 은혜를 헛되이 받고 항상 육신을 따라서 하나님을 반역하는, 언약이 아니라 언약을 거스리는 그런 생애를 살았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는 참 가난한 심령으로 자기 자신이 죄 덩어리라고 하는 걸 깊이 인식하면서 오직 예수님만을 온 마음을 다해서 사모하고. 우리를 언약 안에 살게 해주시는, 예수님의 복음의 역사를 온 마음을 다해서 찾는 저희들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